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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 1905년은 우리나라와 일본이 소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한 해다. 다른 말로는 을사5조약, 을사보호조약, 한일협상조약이라고도 한다. 을사늑약은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5적만이 참석한 회의에서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다. 일제는 한국의 내정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무력으로 이 늑약을 체결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내의 반일 열기는 고조되어 각종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항일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조약을 ‘합일협상조약’이라 부르지 않고 ‘을사늑약’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1905년 을사년에 체결되었다.
(2) 강압적인 상황에서 불평등한 내용으로 체결되었다.
(3) 한국의 관인을 일본 관리가 훔쳐 찍었고, 협정에 임하는 양국의 대표에 대한 양국 통치권자의 위임 절차가 결여되었다.
(4) 고종 황제가 비준을 거부하고 이 조약이 무효임을 여러 차례 천명하였다.
을사늑약 배경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며,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조약을 통해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같은 해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러시아로부터도 마침내 한국에 대한 지도·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승인받았다.
열강들로부터 한국의 보호국화(保護國化)에 대한 승인을 얻어낸 일제는 이어서 한국에 보호조약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일제가 한국의 보호국화에 관한 기본방침을 확정한 것은 1904년 5월 31일의 내각회의에서였다. 내각회의에서 한국의 국방 및 재정의 실권장악, 그리고 외교의 감독과 조약 체결권의 제약 등을 통한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을 결정했다.
을사늑약 내용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열린 궁중의 어전회의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하야시 공사는 이토를 불렀다. 헌병사령관까지 대동하고 들어온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고 대신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찬성여부를 물었다. 이에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등은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으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했다.
그 내용은 제1조 일본 정부는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고, 일본 영사는 외국에서의 한국의 이익을 보호할 것, 제2조 일본 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 제3조 통감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 폐하를 내알(內謁)하는 권리를 가지고,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그밖에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설치해 본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관장한다는 것 등이다.
반일열기 고조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내의 반일열기는 고조되었다. 11월 20일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성과 조약에 조인한 매국 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한 데 이어 〈제국신문〉·〈대한매일신보〉 등도 조약의 무효와 각 지방의 조약반대운동을 알리는 글들을 싣고 반일여론을 확산시켜나갔다.
그리고 유생들과 전직·현직 관료들의 을사5적의 처단과 조약파기를 주청하는 상소가 연이어지는 가운데 민영환을 비롯하여 전 의정부대신 조병세, 전 참정 홍만식, 학부주사 이상철, 김봉학, 송병선 등은 자결로써 국권침탈의 울분을 토했다. 서울 시내의 모든 상가는 철시를 단행하여 조약체결에 대한 분노를 표시했으며, 각급 학교의 뜻있는 교사와 학생들도 동맹휴학을 결행하고 조약반대운동에 동참했고,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친일파 이완용 재산 '여의도 7.7배
대표적인 친일파 이완용(1858~1926)이 소유했던 땅이 여의도 면적 7.7배에 달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동안 알려진 이완용 토지 규모는 1919년 토지대장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자료까지 찾아 동명이인을 제외하고 모두 확인한 친일재산조사위 내부보고서에 따르면, 실제 토지 규모는 1570만㎡보다 664만㎡가 넓은 2234만㎡였다.
이는 여의도 면적의 7.7배에 달하는 크기로, 조사위가 4년간 활동 끝에 친일파 168명으로부터 환수 결정한 전체 토지보다도 1.7배가 넓다. 실제 이완용은 소유했던 토지 98%를 광복전에 팔아넘겼다.
미국에 나라 팔아먹으려 하는 내란 일당들
주지하다시피 윤석열 정권의 외교 기조는 미국에 퍼주고 일본에 설설 기는 거였다. 그리하여 윤석열은 후쿠시마 원전 핵폐수가 안전하다며 우리 돈을 들여 홍보해주었고, 한미일이 동해에서 군사 훈련을 할 때, 미군이 동해를 일본해라 표기된 지도를 사용해도 항의 한 마디 하지 못했다. 심지어 국치의 날 일본 해군과 독도 부근에서 군사 훈련을 했다.
윤석열 정권은 한국 10대 재벌들을 데리고 다니며 미국에만 140조를 퍼주었다. 그러나 얻어온 것은 별로 없이 바이든이 대선에 출마하지 못했고, 트럼프가 당선된 바람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다. 형님처럼 모시던 바이든과 기시다가 동시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 윤석열도 파면되었다.
내란 일당이 대선 출마?
윤석열이 파면되고 양자 대결에서 국힘당 잠룡들이 일제히 이재명 후보에게 20%이상 밀리자 수구들이 낸 게 한덕수 차출론이다. 그러나 지지율이 미미해서인지 아직 출마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한덕수가 대통령 노릇을 하며 미국에 퍼주려 한다는 점이다.
한덕수는 외신 기자회견에서대선 출마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해 사실상 출마를 기정사실화했다. 한덕수는 트럼프가 요구한 미군방위비 부담금을 다시 협상하겠다고 밝혀 수용할 뜻을 내비쳤다. 트럼프는 미군방위비 부담금으로 100억 달러(14조)를 요구하고 있다.
한덕수는 관세협상에 대해 트럼프와 싸우지 않겠다고 말해 손해를 감수할 뜻을 내비쳤다. 한덕수는 “미국이 우릴 잘 살게 해주었다.”며 트럼프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줄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아무런 권한도 없다. 44일 후면 정권이 바뀌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바보가 아닌 이상 허깨비와 협상하겠는가? 만약 그들이 미국에 퍼주고 일본에 설설 긴다면 ‘신을사5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