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조선일보 © 서울의소리 |
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가 방씨조선일보에 ‘’국가 원로‘를 생각한다’는 글을 기고했다. 언론인의 역할은 내팽개친 채 사주 눈치만 살피는 방씨조선일보 종업원들의 뻔한 얘기는 신물이 난다. 외부 필진의 글을 읽으며 그들조차 ‘준종업원’이 된 것은 아닌지 걱정한 적이 많다. 교활한 방씨조선일보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위해 그들의 입을 빌었을 뿐이라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대가로 돈 몇 푼까지 얹었다면 그 자체로 흉악 범죄다.
그래도 전 교수의 이번 글만은 그 범주를 벗어나는 듯하여 읽을 만했다. 이른바 원로들에게 치열한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대목이 눈에 띄었다. 원로가 되기 위한 최우선 조건이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책임이란 말에 공감이 간다. 국가 원로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봤으면 한다는 마무리도 좋다. 다만 그가 언급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공허하게 들린다. 방씨조선일보에 이런 말이 쓰였다는 자체로 비극적인 희극이다.
대한민국 역사는 2025년 4월 4일을 어떻게 기록할까? 그날 나는 온갖 범죄 혐의를 받는 윤석열과 김건희가 은거하고 있는 한남동으로 서둘렀다. 방씨조선일보 폐간시민실천단은 내란 수괴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첫해인 2022년부터 윤석열 퇴진을 요구하며 ‘촛불행동’과 함께해왔기에 당연한 발걸음이었다. 한강진역이 무정차 통과라서 이태원역에 내려야 했다. 중무장한 채 여기저기 서 있는 경찰을 보며 10. 29 참사를 떠올렸다. 그날 그들은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를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윤석열 파면 선고로 유가족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리기를 기원했다.
한남동 쪽으로 서두르며 문형배 헌법재판관의 판결문을 듣게 되었다. 처음부터 숨 쉴 틈을 주지 않는 정연한 논리에 5분도 되지 않아 주문이 명확하게 머리에 떠올랐다.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나도 모르게 ‘파면됐어’라고 목청껏 외치며 감격을 나누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옆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챙겨 들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나이 지긋하신 이들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가혹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비가 떠올랐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운명을 가른 2025년 11시 22분이 지났다. 헌법재판관 문형배의 모습에 자연스레 겹치는 얼굴이 있었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와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책을 언급한 적이 있다. 어른이라는 말이 그렇게도 고귀한 말인 줄을 새삼 깨닫게 된 계기였다. 어른이라는 말로도 모자라 어르신을 고집하는 세상이다. 지금 어르신들은 숨을 헐떡이며 성조기를 쥐고 흔들고 있다. 그래도 한 마디는 따져야겠다. 문형배 재판관님, 그렇게 쉬운 말을 하기가 그리도 어려웠느냐고.
파면 선고가 끝나고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담아보려 잠시 멈춰 섰다. 파면 선고가 났음에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한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분노에 찬 욕설을 내뱉는 상대적으로 젊은 몇몇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이들의 눈길이 아프게 다가왔다. 사회적 원로로 남아 있을 수도 있을 저들을 아스팔트 위로 불러낸 자들은 누구인가? 온갖 요설로 그들을 현혹하고 저 바닥에 내팽개친 자들은 과연 누구인지 묻고 싶다. 자연스레 방씨조선일보가 떠오른다.
전 교수의 말대로 후대에 보탬 되는 지혜와 경륜을 갖춘 이들이 떼거리로 몰려다니다 집단 사기를 당한 듯한 처지를 어찌 보아야 할지 난감하다. 왜 정치 음모가들은 이들에게 이토록 잔인하고 가혹했는지 곱씹어보아야 한다. 풍문대로 돈 몇 푼으로 동원했다면 그 짓을 한 자들은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한 사람도 그리 떳떳하지 못하니 더욱 난감한 처지가 아닐 수 없다.
방씨조선일보를 내란일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윤석열의 내란 준비부터 파면에 이르는 동안에도 줄기차게 내란 세력들을 비호한 까닭이다. 이른바 원로라는 사람들을 소환해서 국민들을 현혹하려는 꼼수도 동원했다. 불려 나온 원로들은 한결같이 제대로 윤석열을 꾸짖지 않았다. 방씨조선일보가 맡긴 역할이 아니기 때문일까? 그들은 국회에서, 남태령에서, 한남동에서, 광화문에서 민주주의를 사수하던 이들에게만 ‘입바른’ 소리를 하기 일쑤였다. 이들이 원로도 어르신도 아니었음이 드러나는 방씨조선일보가 만든 비극적 상황이었다.
전성인 씨의 말에 몇 마디 덧붙인다. 원로라면 남보다 자기편이란 자들을 꾸짖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제 편이라고 감싸고 돌며 남에게만 호통치는 사람은 나이 먹은 잔소리꾼으로 원망받는 뒷방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노욕에 사로잡혀 한 자리라도 꿰차 보려 한다면 원로는 고사하고 망령 난 노인네 소리 듣기 십상이다. 장수 시대를 살아내는 지혜를 갖추지 못하고 자기 고집만을 내세우며 마치 세상 이치를 모두 통달한 것처럼 행세한다면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낄끼빠빠를 알아야 원로랄 수 있다.
1920년에 창간된 조선일보는 1933년 방응모가 인수하면서 제 발로 오욕의 길을 걸어왔다. 건강한 견제와 비판을 하는 언론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특정 진영의 선전선동지 역할에 앞장섰다. 진실을 추구하고 공익을 지키며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역할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자신 혹은 자기편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고 제 편일수록 따끔하게 회초리를 대는 역할을 하지 못하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원로 축에 낄 수가 없다. 105년 되었다고 우쭐하는 방씨조선일보에게 들려줄 말이다.
그리하여 다시 조선일보는 폐간만이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