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소설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2000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이래 24년 만이다. 우울한 국민들에게 잠시나마 즐거움을 선사하고 몇 날은 한강이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포함해 10건 이상의 기사를 쏟아냈다.
1. 10월 10일 8시 30분에 ‘노벨 문학상에 소설가 한강…김대중 평화상 이후 24년 만에 수상’이라는 1보가 올라왔다. ‘역사의 트라우마에 맞서는 동시에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인 산문’이라는 선정 이유도 덧붙였다. 2016년에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했다는 소식도 함께 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수상 내용도 제목에 올리는 과감함도 선보인 조선일보 답지 않게 차분한 기사였다.
2. ‘“5·18이 내 인생 바꿨다” 한국 첫 노벨문학상, 한강은 누구?‘라는 10월 10일자 기사다. 한강은 초기작부터 일관되게 인간의 폭력성과 그에 따른 상처를 작품으로 다뤄왔다고 소개한다. 한강이 과거 한 인터뷰에서 이 같은 작품 세계가 형성된 계기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고 밝혔단다. 서울로 이사한 뒤 아버지 한승원이 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된 이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첩을 보여주었다며 “열세 살 때 본 그 사진첩은 내가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된 비밀스러운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고 전한다. 5.18에 대한 언급으로 조선일보가 키워온 열혈 독자들의 살벌한 댓글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3. ‘“오늘부터 ‘문송합니다’ 금지”… 국문과 출신 한강 쾌거에 네티즌 반응‘이라는 10월 10일자 기사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 네티즌들도 들썩이고 있단다. 소셜미디어 엑스(X) 등 온라인에는 “금일부로 ‘문송합니다’ 사용 금지”, “국문과 나오면 무엇을 하는가? 아아 노벨상을 타는 것이다...!”, “국문과 최고 아웃풋”, “문과는 승리한다” 등의 재치 있는 반응들이 올라왔다고 쓰고 있다. ‘문송합니다’는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의미로, 인문계 학생들이 취업난을 자조하는 표현이라는 친절한 해설과 함께. 역시 조선일보다운 선정적인 보도이긴 하지만 기분 좋은 날이니 오늘만은 특별히 눈감아주기로 하자.
4. ‘한강 부친 한승원 “딸, 전쟁으로 이렇게 많이 죽는데 무슨 잔치냐고 해”이라는 10월 11일자 기사다. 전쟁 선동에 여념이 없는 조선일보로서는 다소 의외의 내용이다. 특히 이스라엘의 학살에 대해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는 조선일보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으로 잠시 제정신이 돌아온 듯하다. 그래서 문학은 위대하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아버지 한승원 작가를 넘어서는 세계관을 조선일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사람이 이렇게 죽어 나가는데 상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기자회견조차 사양했다는 말이 가슴에 박힌다. 조선일보 종업원들도 느끼는 바가 있길 간절히 바란다.
5. ’한강의 노벨상 상금 14억원, 세금은 얼마 내야 할까?‘라는 10월 11일자 기사다. 지극히 조선일보다운 기사가 등장했다. 물론 좋은 날이니 이것저것 관심을 갖게 되겠지만 다른 기사 끝에 붙여 쓰지 않고 따로 쓰는 배짱은 대단하다. 외국에서 받는 상에 대해서는 비과세되는 기타 소득이라지만 그림의 떡이다. 세금은 얼마라도 낼 테니 국내에서 상금 달린 상을 한 번이라도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6. ’한강 ‘채식주의자’, 유해 도서로 학교서 폐기? 경기교육청 “사실과 달라”’라는 10월 11일자 기사다. 한강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채식주의자’를 지난해 경기도교육청이 ‘청소년 유해 성교육 도서’로 지정해 폐기했다는 내용이다. 학교마다 자율적으로 학부모 등이 참여해 ‘유해 도서’를 폐기했고, ‘채식주의자’는 한 개 학교에서 폐기했다고 설명했단다. 적절한 지도가 필요한 때가 있지만 무분별하게 학생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아닌지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일방적으로 경기도교육청의 입장만을 알리고 있다.
7. ‘한강 노벨문학상, 한국 문화의 새 역사’라는 10월 11일자 사설이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한국 문학의 높은 수준을 세계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통해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한강 작가 개인의 영예일 뿐 아니라 국가적 쾌거란다. 윤석열 대통령의 페이스북 글만치나 영혼 없는 칭찬으로 들린다.
조선일보의 호들갑에 가까운 기사를 읽으며 드는 생각이다. 그들이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사실은 이른바 우파 정권이 한강을 좌파 혹은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편협한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문화 예술을 옥죄고 있는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 한마디 없이 수상을 축하한다는 말은 위선일 뿐이다. 한강 작가에 대한 기사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악의적인 댓글을 올리는 조선일보가 키워온 세력은 섬뜩한 느낌이 들기까지 한다. 특히 1980년에 조선일보김씨(김대중)는 광주 민주화 항쟁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글을 쓴 장본인이다. TV조선은 5.18에 대해 북한군 개입설을 퍼뜨린 사실도 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을 축하하기에 앞서 자신들의 과오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침묵을 택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