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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대통령 한명숙'이 두려웠나?
대통령 한명숙'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이종필 2010.04.14 [14:52] 본문듣기
▲ 4월9일 무죄판결을 받고 법원앞에서 국민과 함께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하는 한명숙 전 총리      ©대.자.보 편집부 

육참골단(肉斬骨斷). 내 살을 베어 주고 적의 뼈를 끊는다는 뜻이다. 2009년을 휩쓸었던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면 육참골단의 사례가 몇 번 나온다. 백제 무왕이 속함성을 함락시키자 설원랑은 전권을 부여받고 전장에 나선다. 그는 김서현에게 군사 3천으로 아막성을 공격하게 하여 속함성의 백제군을 끌어낸 뒤 자신은 속함성을 탈환한다. 김서현의 아들 김유신은 아막성으로 원군을 보내라고 요구하지만, 설원랑은 육참골단을 읊조리며 이를 묵살한다.
 
바둑에는 사석작전이 있다. 자기 돌의 일부를 버림으로써 다른 곳에서 더 큰 이득을 취하는 전략으로, 육참골단의 전형적인 예다. 전투에서 지더라도 전쟁에서 이긴다는 확신이 든다면, 대 사석작전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프로기사들이다.
 
  
12일 오전 서울 영등포당사에서 열린 송영길 민주당 최고위원 인천시장선거 출마 선언 기자회견에서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됐다 무죄판결을 선고 받은 한명숙 전 총리가 축사를 하고 있다.
ⓒ 유성호

한명숙 "무죄판결"을 보며 '육참골단' 떠올린 이유
 
육참골단. 지난 4월 9일, 한명숙 뇌물수수 사건에 대한 1심 선고공판 결과(무죄)를 지켜보면서 나는 이 사자성어를 떠올렸다. 한편에서는 검찰이 애초부터 무리한 기소를 한 만큼 무죄판결은 당연한 결과라는 반응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미 드러난 의혹만으로도 도덕성에 큰 흠결이 생겼다고 주장한다. 검찰은 즉각 항소할 뜻을 밝혔다.
 
언론과 정치권은 1심 결과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벌써부터 주판알을 튕기느라 분주하다.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한명숙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오세훈 현 시장을 앞서는 것으로 나오기도 했다. 민주당을 비롯하여 그동안 한명숙을 지지해 왔던 세력들은 1심 결과에 반색하며 이 기세를 지방선거까지 끌고갈 작정이다.
 
검찰은 왜 한명숙을 무리하게 기소했을까? 교과서적으로 말하자면 뇌물수수 의혹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애초에 곽영욱 사장의 일관되지 못한 진술만 있었을 뿐이고 (그는 검찰조사에서 했던 자기 진술을 법정에서 뒤집었다.) 5만 달러에 대한 대가성을 찾기도 어려웠다. (검찰은 처음에는 한국남동발전 사장 자리에 대한 대가라고 했다가 한명숙 체포 당일 영장에서는 대한석탄공사 사장에 대한 것이라고 바꾸었다.)
 
그보다는 일종의 정치보복이라거나, 야당의 유력한 후보를 주저앉히기 위한 목적이라는 분석이 훨씬 더 그럴듯해 보인다. 만약 검찰이 한명숙(혹은 예전의 정연주 KBS사장)을 조사하고 기소하듯 이명박(BBK 사건)이나 이건희(수 조원의 비자금)를 다뤘더라면 둘 다 감옥신세를 면치는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2008년 총선에서 떨어진 뒤 출마하는 정치는 안 하겠다던 한명숙을 검찰이 왜 정치무대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였을까? 이 때문에 한명숙은 서울시장 선거에 나설 결심을 굳히게 되고, 1심 무죄 판결 이후 가장 유력한 후보로 부상하고 있다. 민주당 백원우 의원은 "그를 다시 정치로 불러낸 것은 검찰이다, 만약 한 전 총리가 서울시장이 된다면 그 자리로 이끈 건 MB"라고 말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유력한 야당 후보를 주저앉히기 위한 기획수사라고 하는데, 원래 한명숙은 선거에 나설 의도가 없었다. 선거에 나서지도 않을 사람을 굳이 들쑤셔서 선거판에 끌어들여 유력한 후보로 만든 뒤, 유죄를 입증해서 주저앉힌다? 대한민국 검찰이 아무리 막장이라지만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려고, 억지와 허점으로 가득한 기소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유성호

그들은 '대통령 한명숙'을 두려워했던 거다
 
그래서 나는 검찰이 무리하게 한명숙을 기소한 것은 이번 지방선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검찰이 심하게 무리를 해서라도 한명숙과 일전을 불사한 데에는 한명숙이 검찰의 미래(혹은 만약 배후가 있다면 그 배후의 미래)에 큰 위협이 되리라는 생각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검찰이 한명숙을 걸고넘어진 것은 겨우 '서울시장 한명숙'을 염두에 둔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대통령 한명숙'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명숙은 지난 노무현 정부에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성 총리를 지낼 정도의 여걸로서, 말하자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남긴 시대의 자산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의 막강한 잠재력은 이번 사건을 통해서 여실히 드러났다.
 
만약 이런 한명숙이 차기 대선후보로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포용력, 총리로서의 경험, 민주세력의 적통성 때문에 그는 범야권 단일후보로 추대될 가능성이 무척 높다. 이렇게 되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통령 자리를 놓고 박근혜와 격돌하더라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게다가 지금 범야권에서 한명숙을 제외하고 잠재적인 대권 후보들 면면을 보면 마치 지난 2007년 대선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나라당의 강력한 후보와 비교자체가 안 된다.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고 나선 보수 세력이 이명박 정부 2년 동안 한국의 민주주의를 10년 이상 후퇴시킨 것을 보면, 이들은 다시 노무현 같은 개혁적인 대통령이 나타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제한하는 가능성을, 그 싹이라도 초전에 꺾을 것이 분명하다.
 
'대통령 한명숙'과 '서울시장 한명숙'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인사청탁과 함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가 9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 유성호

'대통령 한명숙'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물론 지금처럼 비리사건에 연루시켜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안기는 것도 한 가지 (매우 전통적인) 방법일 것이다. 노무현에게 했던 방식이 이랬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물리적으로 대선에 아예 출마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서울시장 한명숙'은 이 후자의 방법으로 아주 적격이다.  
 
1944년생인 한명숙은 올해 66세로 차기 대선이 치러지는 2012년이면 68세이다. 만약 4년 중임 대통령제로 개헌된다 하더라도 차차기 대선 때는 72세이다. 나이가 부담될 수밖에 없다. 1924년생인 김대중은 73세의 나이로 1997년 대선에 나섰을 때 자신의 건강을 보증하기 위해 유명병원 주치의의 진단서를 공개해야 했다. 한명숙으로서는 사실상 2012년 대선이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그래서 나는 한명숙의 무죄판결을 보면서 육참골단을 떠올렸다. 한명숙을 제외하면 범야권의 대권후보들은 한마디로 지리멸렬이다. 검찰이 물증도 없이 어이없는 논리와 정황으로 잠자고 있던 한명숙을 지금 정치판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온 것은 이 때문이다. 보수 세력에게 이는 완전히 꽃놀이패다. 먼지 털듯이 뒤져서 뭔가 나오면 나오는대로 도덕성에 흠을 낼 수도 있고, 무죄가 되더라도 검찰수사에 대한 반발로 서울시장에 출마하면 차기 대권에 대한 큰 시름을 덜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검찰에게는 유력 서울시장 후보를 수사했다는 부담감과 유력 대선후보를 수사했다는 부담감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한명숙을 지방선거판에 끌어들이려면 그 수법과 논리가 유치하고 어이없을수록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선덕여왕>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미실이 스스로 왕이 되기로 결심하고 설원랑이 중심이 되어 상대등 시해사건을 조작할 때, 설원랑은 그 조작이 조잡하고 유치할수록 더욱 좋을 것이라는 말을 남긴다. 실제 진행과정도 그러하였다. 나는 검찰의 무리한 기소를 보며 미실과 설원랑을 떠올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서울시장 한명숙'은 하나의 거대한 미끼요, 육참골단에 불과하다.
 
지금 민주당과 야권에서는 검찰을 조롱하며 마치 지방선거를 다 이긴 것인 양 한껏 기세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앞서 백원우 의원이 했던 "만약 한 전 총리가 서울시장이 된다면 그 자리로 이끈 건 MB"라는 말을 뒤집으면 "만약 한 전 총리가 차기 대선에 나서지 못한다면 그렇게 이끈 건 MB"라는 말이 성립한다.  
 
물론, 한명숙 전 총리의 서울시장 출마 결심은 나름의 생각과 소명의식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다만, 저간의 상황을 파악해보니 좀 더 멀리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저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말에 나는 새로이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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