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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총리 후보의 국회인준 표결이 7월 3일로 결정되었다. 현재 국힘당에서 펼치고 있는 공세는 별 의미도 없고 근거도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특히 김민석 후보자 공격에 최일선에 섰던 주진우 의원은 오히려 자신의 각정 비리 의혹이 터지면서 오히려 수세에 몰리고 있다. 한편, 나경원 의원등이 김민석 자신 사퇴를 외치며 벌이고 있는 국회 농성은 숙식농성, 캠핑 농성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별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결국 그들 입장에서는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이거라도 해보자는 심정인 듯한데, 절박감이나 위기감도 없이 펼쳐지는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 김민석 후보의 특별한 문제가 아니기에 그저 말꼬리 잡고 트집 잡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김민석 후보는 1992년 총선에 첫 등판했다. 김대중의 추천으로 영등포 을에 출마한 것이다. 당시 김민석은 학생 운동권의 거물이었다. 이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으로 구속된 이력을 지니고 있었다. 1985년 5.18 민주화운동 계승기간을 맞아 5.18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폭로·규탄하기 위해 을지로에 있었던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계획을 세웠다. 5월 23일, 전국학생연합 소속 서울지역 5개 대학생 73명이 미국문화원 2층 도서관을 점거해 ‘광주사태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 등의 구호를 붙이고 주한미국대사와의 면담, 내외신 기자회견 보장 등을 요구하면서 농성을 벌였고 ‘광주학살원흉처단 투쟁위원회’ 명의로 쓰여진 선언문 <우리는 왜 미문화원에 들어가야만 했는가>를 배포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김민석 서울대총학생회장이었다. 농성 나흘 뒤 스스로 농성을 풀고 나와 경찰에 연행됐다. 김민석은 이 사건으로 5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3년간 복역했으며, 1988년 사면으로 출소했다.
이후 김민석은 1992년 4월 총선에서 김대중의 추천으로 영등포 을에 출마한다. 김민석의 나이는 27세에 불과했다. 당시 상대는 민자당의 나웅배 후보였다. 그는 정치거물로 전두환 시절에 경제를 총괄했던 재무부장관과 상공부 장관, 이후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다. 이미 3선의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정치 경력에 있어서 김민석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었다. 그 선거에서 김민석은 나웅배에게 불과 260표 차로 석패한다. 대단한 성과였지만 아쉬운 패배이기도 했다. 이후 김민석은 1996년 총선에서 다시 영등포 을에 출마한다. 이번 상대는 전원일기의 국민 아버지 최불암(최영한)이었다. 그는 이미 1992년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 이력을 지니고 있었다. 영등포을 선거구는 주요 방송국이 포진해 있는 여의도였다. 국회가 위치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번에 김민석은 다른 전략을 취한다. 네거티브 선거가 아닌 상대 후보를 칭찬하는 전략을 썼던 것이다. 이 당시 김민석은 유세 중 “유권자 여러분께서 저 김민석을 선택해주신다면 1등 국회의원과 1등 연기자를 동시에 살릴 수 있다”는 말을 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전략은 적중했고 김민석은 15대 국회에 16,000표차 득표율 15%이상 격차로 거뜬히 승리한다. 15대 국회 최연소 의원이었으며, 당시 나이 31세였다. 2000년에 펼쳐진 총선에서는 무려 60%가 넘는 득표율로 유력한 차세대 정치인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후 2002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지만 이명박에 밀려 패배한다. 그 해 12월에 펼쳐진 대선을 앞두고 김민석은 뜻밖의 행보를 보인다. 정몽준 노무현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정몽준의 편에 섰던 것이다. 수많은 민주진영 사람들이 김민석에 대한 배신감에 지지를 중단한다. 이후 거의 20년 가까운 야인생활 끝에 그는 다시 민주당에 복귀한다. 그리고 총리 후보로 지명된 것이다.
김민석 후보는 무난하게 총리에 임명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 야당 측이 보이고 있는 각종 프레임도 별 소용이 없는 듯하다. 향후, 김민석 총리가 대선 후보급으로 성장할 지의 여부는 이제 본인에게 달려있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더욱 개혁적이고 더욱 민생에 집중하는 총리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