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국무총리와 정운현 총리 비서실장
덴노헤이카반자이
교문을 들어서면 우선 하는 일이 있다. 모자를 벗고 신궁에다 절을 한다. 마음속으로 외치는 소리가 있다. 덴노헤이카반자이.(천황폐하만세).
나는 친일파인가. 그렇다. 천황폐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지는 충성심, ‘가미가제독고다이(신풍돌격대)’가 되어 미 군함에 충돌해 자폭하는 것이 최고의 충성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태어나자 단군의 자손은 천황폐하의 적자로 변했고 일본국가 ‘기미가요’를 아침마다 부르는 8살의 꼬맹이 쪽발이로 성장했다.
눈을 떴다. 아 나는 천황폐하의 적자가 아니고 단군의 자손이다. 달걀이 깨지는 소리가 아니고 북한산과 남산과 한강이 모두 일어나 외치는 대한민국의 아들이라는 소리다.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다. 광복이 가져다준 단군의 아들이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광복이 없었다면 도리 없이 황국의 신민이 되어 일본어로 주접을 떨었을 내가 세종대왕의 은혜를 되새기며 지금 칼럼을 쓰고 있다. 해방이 되자 우리는 ‘ㄱㄴㄷㄹ’을 배웠고 ‘동해물과 백두산’을 노래했다. 안중근·윤봉길·이준·이봉창 의사를 배웠고 유관순 누나를 알았다.
정신을 팔아먹은 선구자들
누가 알았으랴. 한국문학에 눈뜨게 해준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이 일본의 앞잡이로 우리의 넋을 팔았다는 사실을. 반민특위에 체포된 이광수는 말했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는 것이 문명국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으로 알았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그 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친일로 입신양명을 했다. 그 같은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우리는 그들을 존경했고 스승으로 우러러 모셨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바로 알아야 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긴 것은 긴 것으로 알아야 했다.
국군의 씨앗과 기둥은 누군가. 일본육사 출신이다. 육군의 군번 1번은 이형근. 일본 육사 56기, 해방 당시 일본군 대위였다. 어디 이형근뿐이랴. 박정희·정일권·백선엽·유재흥 등 내로라하는 일본육사출신 장교들은 한국군의 심장이었다. 심장은 6·25가 터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 버렸다.
유재흥은 청천강 전투에서 패전과 ‘현리전투’에서 도망친 제3군단장이다. 현리전투 패전 후, 밴플리트와 유재흥 사이에 전설적인 대화.
밴 플리트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 잘 모르겠습니다.
밴 플리트 : 당신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유재흥은 군법회의는커녕 이승만 밑에서 참모총장 대리를 했고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한다. 더 놀라 볼 텐가. 유재흥은 한국말을 몰랐다. 일본군 장교인 유재흥의 애비는 자식을 진정한 황국신민으로 키우기 위해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았고 늘 통역을 데리고 다녔다.
임종국과 친일문학론
시인 조지훈 선생이 아끼는 제자로서 문단에서 성공을 누릴 수 있었던 문학청년 임종국은 일체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전 재산과 인생을 친일역사 연구에 바쳤다. 그는 친일역사 연구 분야의 선구자였다. 1966년 발간된 그의 ‘친일문학론’은 최초의 실증적 친일 연구서로 평가되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일본강점기 친일세력들의 반민족 행위를 소상히 밝히고, 특히 지도급 인사들의 친일행적을 밝힘으로써 지식인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다.
임종국 선생과의 교분을 말하는 것은 외람스럽다. 그의 기개와 애국을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으랴. 청년 시절 명동에서 만나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그의 뜨거운 말을 들을 때 그는 애국혼의 결정체였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이 있다. 정운현이다.
정운현에 관해서 설명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일 것 같다. 이미 언론인으로서 불의한 권력과 함께하지 않았던 정운현은 바로 임종국 선생의 제자다.
중앙일보, 서울신문,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팩트TV 보도국장 등 20여 년을 언론에 종사했다. 정운현은 친일파 규명과 근현대사 조명에 매진했다.
‘친일파-그 인간과 논리’, ‘창씨개명’, ‘친일파 죄상기’, ‘친일파는 살아있다’, ‘친일, 청산되지 못한 미래’,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실록 군인 박정희’, ‘박정희 소백과사전’, ‘안중근家 사람들’ 등 약 30권의 책을 저술했다.
왼쪽은 박정희 군이 혈서를 쓰고 군관에 지원했다는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자 보도, 오른쪽은 ‘다카키 마사오’로 창씨개명한 뒤 만주군관 학교에 입교해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사진(사진출처 – 인터넷)
정운현과 팩트TV에서 함께 일했다. 직접 앵커까지 맡았던 그를 보면서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언론이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걷는 고행자의 모습을 보았다.
국무총리 비서실장
정운현 비서실장. 정운현이 국무총리 비서실장에 임명됐다는 소식을 들으며 우선 놀랐다. 왜 정운현이지. 다음 순간 가슴이 뻥 뚫리는 통쾌함을 느꼈다.
국민들은 잘 알 것이다. 한국의 비서정치가 어떤 것인가를 너무나 잘 안다. 특히 비서실장이라는 자리는 마치 오명의 상징처럼 인식되어 있다.
한국의 정치사가 그랬다. 이승만 정권의 박찬일. 박정희 정권의 이후락, 그밖에도 모래알처럼 많은 비서실장이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비서실장의 백미는 김기춘이다. ‘우리가 남이가’로 유명한 김기춘은 이제 누구에게 이 말을 할 것인가.
접자. 지금은 흘러간 비서실장의 모습을 조명하는 무대가 아니다. 또한 2만 원짜리 ‘선글라스’도 맘대로 쓰지 못하는 불쌍한 비서실장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지금 말하려는 것은 정운현이다.
‘걸어온 길을 보면 그 인간을 안다’고 했다. 세상없이 용빼는 재주를 가졌다 해도 과거를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력서가 필요하고 경력이 중요한 것이다.
이낙연 총리는 자신이 왜 정운현을 비서실장으로 선택했는지 자신의 페이스북에 적었다. “길동무가 돼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없는 역사에 대한 지식과 기개를 채워달라고 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한가지 내게 추가하라면 ‘역사의식’을 들 수 있다. 오늘의 한국에서 역사의식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있을까.
정운현과의 교분에서 나는 한 번도 그가 대의에 어긋난 주장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답답할 정도의 원칙론자.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과 애국심.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정운현은 가지고 있다.
‘길동무’가 되어 달라는 이 총리의 제의를 정운현은 받아드렸다. 이제 남은 것은 정운현을 지켜보는 것이다. 모든 언론이 정운현의 국무총리 비서실장 임명을 깊게 다루었다. 일본언론도 정운현에 대한 비서실장 임명을 관심 있게 다룬다. 왜일까. 그들도 정운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정운현이라면 머리를 흔드는 보수 매체다. 친일매국노의 후예들도 이를 간다. 그러나 그는 갈 길을 갈 것이다. 온갖 모략이 기다릴 것이다.
어깨동무라는 동요가 있다. ‘길동무’란 그런 것이다.
동무 동무 어깨동무
언제든지 같이 놀고.
동무 동무 어깨동무
어디든지 같이 가고.
동무 동무 어깨동무
천 리 길도 멀지 않고.
동무 동무 어깨동무
해도 달도 따라오고
이기명 팩트TV 논설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