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KBS뉴스 © 서울의소리 |
대한의 독립을 위해 독립지사들이 일제와 맞서 싸웠던 수많은 의거와 사건들이 존재하며 그 과정에서 순국하거나 일제에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분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우리는 일제에 항거한 3.1 만세를 기억하지만 그 이전에 있었던 2.8독립선언이나 무오독립선언을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하고 있다. 더욱이 윤석열 정부 들어 친일 굴욕외교가 도를 넘어버린 상황에서 정부 차원에서 독립운동을 알리거나 발굴하는 일은 더욱 등한시 된 것도 사실이다. 윤석열 탄핵 정국으로 나라가 꽤나 시끄러운 상황에서도 우리는 그 시절 우리 선조들의 독립운동을 되새기면서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국민적 자존심을 되새겨야 한다. 2.8 독립선언은 일본 제국 도쿄에서 유학하던 한국인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독립 선언식을 가진 사건이다. 이 사건은 대한의 첫 독립 선언서인 무오독립선언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무오독립선언은 1918년 11월 만주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이었으며 이 사건의 주축 인물들이 훗날 임시정부를 만든 장본인들이기도 했다. 1919년 기미년 3.1운동 당시 발표했던 기미독립선언과 구분하기 위해 무오독립선언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독립선언서에 기재된 바로는 대한독립선언서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유학생들은 당일 오전 각국 대사관과 일본 국회의원, 조선총독부, 일본 여러 지역의 신문사에도 독립 선언문을 발송했다. 이날 오후 2시 재일본 도쿄 조선 YMCA 강당에는 조선 유학생 학우회 총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회의가 개최되고 나서 최팔용에 의해 "조선 청년 독립단"을 결성하려는 '긴급 동의'가 요청되었다. 이윽고 독립 선언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고 백관수가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자마자 대회장을 감시하던 일본 제국 경찰이 들이닥쳐 60여명의 유학생을 체포하였고 강제 해산시켰다. 주모자였던 최팔용, 백관수를 비롯한 학생 8명이 기소되었다. 이후 2월 12일과 28일에도 조선인 유학생들은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 행진을 시도했다. 한편 이 기간 동안 기소된 학생들을 변호한 사람이 바로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라는 인물이다. 평생을 한국 독립운동의 변호에 힘써서 노력해왔던 것에 대한 공로로 2004년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만주에서 있었던 무오독립선언은 도쿄 유학생 중심으로 진행된 2.8 독립선언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3.1 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라 밖에서의 독립운동으로 자극을 받은 국내의 선각자들이 주축이 되어 3.1운동은 당시 만주는 물론 한반도 전역에서 약 3500여 차례 진행된 것이다. 106년이나 지난 사건까지도 우리가 선열들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하는 이유는 민족적 자긍심 없이 일본에 굴욕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극우들이 일으킨 내란사건의 뿌리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