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일 오늘은 전태일 열사의 기일이다. 전태일은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었다. 그의 죽음에 한국 사회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48년 9월 28일 경상북도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고운 심성과 다정다감한 성격, 불의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 기질의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가 재단사였던 그의 집안은 어렸을 때부터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 한 명이 심하게 기침하다가 각혈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녀를 병원에 보내기 위해 도움을 청하고려 했으나 알리지 말라고 애원하는 여공의 모습과 얼마 뒤 병에 걸린 여공이 해고된 걸 보게 되었다. 이후 재단 보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 박봉, 산재임에도 일방적으로 부당해고 당하는 현실, 질병(폐렴 등)으로 시달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보조 여공들을 돕는 것은 물론 그러한 노동 현실의 타파와 개선을 위한 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근로기준법이라는 노동 조건에 대한 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법률 내용을 독학하려고 하였으나 근로기준법 전문에 한자가 많아 내용을 도통 알 수 없어 "대학을 나왔더라면 또는 대학에 다니는 친구라도 있었으면 알 수 있었을텐데..." 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전태일 평전』을 통해 알려진 그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의 대학생들에게 현실 참여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해설서를 구입하여 밤낮을 안 가리면서 읽었는데 말이 해설서지 법률 용어 투성이였기 때문에 국민학교 중퇴 학력의 전태일에게는 악전고투였던 것이다.
전태일 열사를 통해 그동안 미처 주목받지 못했던 장시간의 열악한 근무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의 현실이 한국 사회에서 조명 받게 되었다. 정치적 의미에서의 민주화만을 염두에 두던 대학생과 지식인들은 이때부터 노동자와 도시 빈민 등의 삶의 문제들에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야학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교육시키고 권리 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거나 공단에 직접 취업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지난 11월 9일에는 해마다 그랬던 것처럼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전태일 열사의 기일 즈음에 진행하는 일종의 연례행사였다. 노동자들의 평화 집회에 경찰은 폭력적 진압으로 국회의원의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만행을 저질렀고 일부 노동자들의 항의에는 구속영장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가리려 했다. 과거 노동자들과 집회 참가자들을 향해 저질렀던 군사정권의 만행을 우리는 다시 2024년에 목도하고 있다. 역사가 돌고 도는 수레바퀴라고 한다면 과거 박근혜의 탄핵처럼 국민들은 21세기 야만의 시절을 지우기위해 윤석열 탄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