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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주석 암살범 '안두희'를 척살한 '박기서'선생

김구주석 서거 62주기 추모행사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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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소리
기사입력 2011/06/23 [23:09]

"우리 나라 독립의 화신이요, 국부(國父)이신 백범 선생을 시해한 그 자는 인간 쓰레기입니다. 배운 게 부족한 제가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인간 쓰레기를 치우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작부터 청소부 심정으로 그를 처치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만고역적 안두희, 그런 자가 호의호식하면서 천수를 다 누린다면 다시는 이 땅의 교육이 안 되지요. 후손을 볼 낯이 없는 일이지요. 그런 자와 같은 하늘 아래서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 무렵 저는 천주님을 믿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십계명에도 살인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도 왜 종교적으로, 인간적으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사회의 도덕성이랄까 대의랄까, 국가 정의를 위해 그를 처단하는 게 옳다는 신념에서 모든 벌을 받을 각오하고 단죄하였습니다."
 
백범 선생 56돌 기일을 아흐레 앞둔 지난 6월 17일 오후 2시,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를 참배한 뒤 나무 그늘 의자에서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56·택시기사)씨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박기서씨는 지난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 안두희를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몽둥이로 절명시켰다.
 
 
▲ 백범 묘쇼 앞에 선 박기서 선생  

백범 묘소, 여기만 오면 아주 편해요
 

▲ 백범 김구 선생 존영 

기자는 올 봄 조문기 선생의 자서전 출판 기념회에서 안두희를 저 세상으로 보낸 박기서씨를 만났다. 인사를 나눈 뒤, 나는 그에게 안두희의 이 세상 마지막 모습과 그 뒷이야기를 듣고 싶은 생각에 면담을 부탁드렸는데 박기서씨는 흔쾌히 허락했다.
 
하지만 서로 사는 곳이 멀고, 그는 개인택시 기사로 일하고 있어 날짜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백범 선생의 기일을 넘길 수 없어서 6월 17일로 어렵게 날짜를 잡았다. 우리는 효창원 백범 묘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에 지인과 점심을 나누면서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씨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가 그동안 잘 먹고 잘 사는 꼴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법치국가에서 개인이 사형으로 보복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그와 헤어진 뒤 백범 묘소로 가기 위해 신촌에서 택시를 탔다. "효창동 백범묘소로 갑시다"라고 하자, 기사가 무슨 일로 거기에 가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고는 박기서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도 안가지만(그 기사의 이름은 안 아무개였다) 그 놈을 제 명대로 못 살게 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지요. 안두희가 제 명대로 다 살고 죽었다면 이 땅에 정의와 양심은 모두 다 땅에 묻혔을 테지요. 같은 택시기사로 박기서씨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런 분이 국가유공자가 돼야 합니다."
 
백범 묘소 앞에서 박기서씨를 만나 인사를 나눈 뒤 대담에 앞서 먼저 묘소에 참배코자 산소로 갔다. 내가 앞장서고 박기서씨가 뒤따랐다. 묘소 앞에 이러르자 박기서씨는 묘소 어귀 잔디밭에서 잡풀을 뽑았다. 마치 당신 조상의 무덤을 참배하는양.
 
"여기만 오면 마음이 정화되고 아주 편해요."
 
절을 두 번 드리고 일어난 박기서씨의 첫 마디였다.
 
"제가 지난번 백범 선생 암살 배후 관련 기사를 연재할 때, 몇몇 네티즌들이 '박기서는 미 정보부 끄나풀이 아니냐?'라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쪽의 사주를 받아서 안두희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고 저 세상으로 보낸 거 아니냐? 마치 케네디를 암살한 오스왈드를 다른 자객들이 죽여 버린 거나 아키노를 암살한 하수인들을 또 다른 총잡이들이 사살해 버린 거와 같이 말입니다."
 
기자의 말에 그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 듯 한동안 입을 닫지 못했다.
 
"우와! 정말, 정반대 생각이네요. 야아 참, 안두희가 미국 정보부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진실이 왜곡된 데는 어이가 없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안두희는 살려둬 봤자 더 이상 입을 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대로 살려뒀다가 자연사하면 우리의 민족 정기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뒷날 후손들에게 뭐라고 말할 것이며 나중에 백범 선생을 어찌 뵐 수 있겠습니까? 저는 청소부 심정으로 그를 처단했습니다."
 
"청소부 심정으로 안두희 '처단'했다"
 

▲ 안두희 
 
- 안두희를 처단한 그날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그때 저는 버스기사였습니다. 버스기사들이 일과를 마치는 시간은 밤 12시 30분에서 1시 사이입니다. 그날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 잠깐 눈을 붙이고 미리 준비해 둔 몽둥이를 품속에 넣고 안두희 집으로 갔습니다. 그때가 새벽 3시 무렵이더군요.
 
안두희 처가 일찍 운동하러 간다기에 그 순간을 노렸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엄청 기다려도 아침 내내 문이 안 열려요. 그래서 틀렸나 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11시 무렵에야 문이 열려요. 나중에야 알았지만 안두희 처가 슈퍼에 가려고 문을 따고 나왔다더군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안두희 처를 밀치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지요."
 
- 안두희와 무슨 얘기를 나눴습니까?
"'네가 백범 선생을 돌아가시게 한 안두희냐!'고 하자 누워 있던 안두희가 일어나서 노려보더라고요. '네가 백범 선생님을 암살했느냐?'라고 다시 다그치자 안두희가 뭐라고 말하는데 분명치가 않더군요.
 
사실 그때 나도 무척 흥분돼 있었기에 안두희의 말이 제대로 들릴 리도 없었지요. '내가 오늘 너를 처단하러 왔다'고 하는데 안두희 처가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니라 내 뒤를 쳐다 보더라구요. 그래서 뒤를 돌아봤더니 문이 열려 있더라고요. 얼른 문을 잠그고 돌아서자 그 순간 안두희가 어떻게 해 볼 양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안두희는 키도 크고 주먹도 크더라고요. 그의 덩치와 큰 손을 보는 순간 위압감이 느껴지고 저 손으로 백범 선생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생각이 들자 적개심이 불타오르더군요. 그래서 몽둥이로 젖 먹던 힘을 다하여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더군요.
 
안두희 처가 말로 하지 사람을 치느냐고 달려들더라고요. 그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준비해 간 끈으로 안두희의 처 손을 묶고 '조용히 하지 않으면 당신도 다친다'고 위협한 뒤 다른 방으로 데려가자 안두희 처가 그제야 제 눈에서 살기를 눈치 채고는 벌벌 떨더라고요. 그때부터는 살려달라고 빌더군요.
 
다시 안두희가 있는 방으로 돌아오자 그때부터는 보이는 게 없었어요.
그냥 복날 개 패듯이 팼습니다. 애초부터 적당히 혼내줄 게 아니라 아예 끝장을 내려고 작정하고 갔었지요."
 
"백범 선생 살아계셨다면 6·25 일어나지 않았을 것"
 

▲ 백범 묘소에 참배하는 박기서 선생   

- 그 뒤 안두희가 꿈에 보이거나 응징에 대한 죄의식은 없는지요?
"안두희가 나타난 꿈은 한번도 꾸지 않았어요. 저도 피와 눈물이 있는 사람인데…. 하지만 그제나 이제나 나는 안두희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어요. 백범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면 6·25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단정'을 세웠던 이승만 일파가 백범 선생을 암살하자 민심이 7할 이상은 돌아 버린 거예요. 김일성이 그 반이(反李, 반이승만) 정서를 자기 지지로 오판하여 밀고 내려온 거지요. 또 전쟁이 일어났더라도 백범 선생이 계셨더라면 아마 전선으로 달려가서 온몸으로 막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백범 선생을 깔아뭉개고 남하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 그런 면에서 안두희와 그 일당은 우리 민족에게 천추에 죄를 진 반역자들입니다."
 
- 그 일로 형을 얼마나 받았습니까?
"1심에서 7년 구형에 5년 언도를 받았습니다. 2심에서는 5년 구형에 3년으로 감형 받았습니다. 그래서 안양교도소에서 1년 남짓 살고 청주에서 6개월 정도 사는데 3·1절 특사로 풀어주더군요. 그런데 교도소에 있을 때가 더 행복하더라고요."
 
외람되지만 이는 마치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는 독립전사들이 감옥이나 형장에서 느끼는 행복과 같을 거라고 했다. 마침 가까운 유치원에서 교사들이 원생들을 데리고 왔다. 언저리가 소란하여 나무 의자에서 일어나 묘소 언저리를 거닐었다.
 



 
[사설]안두희와 박기서
[한겨레]2006-10-24 01판 29면 1276자 사설
 
꼭 10년 전 일이다. 박기서는 안두희에게 물었다. “네가 안두희냐?” 도피와 병마에 지친 늙은 안두희는 소리 나는 쪽으로 겨우 고개를 돌렸으나, 자신이 안두희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못했다. 박기서는 ‘정의봉’을 꺼냈다. 순간 종교적인 번뇌가 스쳐갔다. 버스 운전으로 겨우 꾸려가는 가정형편과 고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의 눈망울이 떠올랐다. 결국 박기서는 정의봉을 휘둘렀다. 그는 ‘겨레와 조국에 죄를 지은 자가 하늘이 주는 수명을 다하는 것’을 결코 볼 수 없었다. 이 땅에서 ‘정의’가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안두희는 허망하고 처참하게 숨졌다. 1996년 10월23일이었다.

육군 소위이던 안두희는 1949년 6월26일 백범을 암살하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헌병 지프에 실려가서 무기형을 받았다. 그의 수감생활은 고기, 술, 담배가 원없이 제공되는 호화판이었다. 다음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현역으로 복귀하여 대령까지 초고속 승진했고, 전역 후에는 검은 세력의 비호 아래 군납업에 손을 대 한때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만큼 큰돈을 만졌다. 자유당 붕괴 후, 그는 이름을 바꾸고 부인과 위장이혼하고 가족을 외국으로 빼돌렸다. 자신도 이민을 시도했다. 그는 백범 암살에 관한 일들에 대해 끝내 거짓과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죽음은 삶의 단순한 종결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이다. 죽음은 종국에 삶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래서 안두희의 죽음은 극적 상징성을 띤다.

박기서는 성당에서 자수했다. 그리고 법이 정한 대로 형을 살고, 예전처럼 운전대를 잡고 살고 있다. 그가 그날 한 일을 두고 개인이 개인을 사적으로 징벌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묻고 싶다. 과연 그가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을 저버리고, 개인적인 응징을 결심하고 실행할 때까지 이 나라와 이 사회는 무엇을 했는가라고 말이다. 그가 그날 한 일은 음모와 거짓과 침묵으로 점철된 거대한 악의 구조에 온몸을 던진 도전장이고, 불의에 면역되고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제 제발 진실을 향해 눈과 귀를 열라는 피맺힌 절규에 다름 아니다.

박기서가 안두희를 난생처음 만나고 영원히 헤어진 지 10년이 지났다. 강산이 변했을지는 모르지만, 현실은 여전히 완악하고 진실은 아직도 멀리 있다. 이제라도 백범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은폐했던 검은 세력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야 한다. 그것이 겨레의 자긍심을 살리는 일이고, 역사의 진실을 찾아나가는 일이고, 또다른 박기서를 만들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009-05-29 조선동/예원학교 국어교사 
 

김구 선생 서거 62주기를 맞이하여 추모행사와 추모 문화제가
아래 장소에서 열린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주석 서거62주기 추모행사>

        강북삼성병원 경교장 앞마당 6월26일 오전 10시30분 

▲     © 서울의소리
 
 
 
 
 
 
 
 
 
 
 
 
 
 
 
 
 
 
 
 
 
 
 
 
 
 
 
 
 
 
 
 
 
 
 
 
 
 
 
 
 






<백범김구선생 서거 제62주기추모문화제>

          6월 26일(일) 오후 2시부터 종로 남인사동


삼천만 동포의 가슴에서 칠천만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선생 서거 62주기를

맞이하여 민족의 자주와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분단을 막고

조국을 통일하고자 하신 백범 김구선생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추모문화제를 거행하고자 하오니 바쁘시더라도 애국시민과 청년학생 여러분들이

동참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백범김구선생 서거 제62주기추모문화제

■ 주요행사 : 백범김구선생서거 제62주기 추모문화제

■ 행사일시 : 2010년 6월 26일(일) 오후 2시부터

■ 주 최 : 백범김구선생 서거 제62주기추모문화제준비위원회

■ 행사장소 : 남인사동




참여단체:단군민족평화통일협의회,대종교,한민족운동단체연합, 독립유공자유족회, 백범사상연구회,백범문화재단, 단군예술단, 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백두산국선도, 예학당, 한독당동지회,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홍익청년연합, 부정부패추방실천시민회, 전국자연보호중앙회, 좌계학당, 독도지키기운동본부, 한반도시대포럼, 백두산지키기운동본부, 천안민학전가, 목멱사랑회, 단군예술단, 민족경제인연합회, 남북농업수산교류협회, 홍익생명사랑회, 홍익사상연구원 외 80단체

백범김구선생 서거 제62주기추모문화제준비위원회

 문의 : 02) 723-0083

사무총장 윤승길 011-423-3038

총무부장 김기혁 010-6007-4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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