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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시원 '임시정부수립'100주년..'독립·민주·평화 정신' 계승, 실천

1기(초대)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 개칭, 그 '헌법정신'과 내재된 '3·1혁명정신'을 실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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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시 칼럼
기사입력 2019/04/11 [22:41]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하게 한다. (김광균, '추일서정')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인데, 가을이 아니어도 '부패망국'(腐敗亡國)의 암울한 시대에 고군분투, 악전고투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생각하면 여지없이 떠오르는 싯귀다. '낙엽ㅡ망명정부', 몹시 암담하다 못해 처연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연조와 기반이 전혀 없었던 '임시정부'는 더 그랬을 터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임시정부는 다른 나라들의 망명정부와는 달리 반만년 한겨레의 역사에 있어 결연하고 희망찬 새로운 시작이었다. 망국의 치욕과 침탈의 고통을 견디어 이겨내며 구시대·구체제의 허물을 벗어버리는 재창조의 역사였다.

 

 

'민주주의, 국민주권·시민정치, 민주공화국'−그럴진대 망명정부이든 과도정부이든 임시정부든, 그렇건 아니건,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4월 10일 밤, 대한의 인민대표 29인이 밤을 지새우는 산고 끝에 그 이튿날 한낮, 드디어 '민주공화제'의 기치를 치켜들어 '민주정부'를 세웠다. 이 역사적인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격동하는 세계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극적이고 치열하게 대응했던 우리 선열들이 3·1독립혁명에서 천명한 주체적 '독립·민주·평화 정신', 그 실천의지의 발로였다.

 

(앞서 말했듯이) 나치스 독일의 침공으로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네덜란드, 폴란드 등, 10여 개의 국가들이 런던에 망명정부를 꾸렸다. 그래서 유럽인들에게 영국은 '마지막 희망의 섬'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국은 자국이 지배하는 국가들에게 탈식민지화의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에는 호의적이지 못했다. 그러므로 민족지도자·선열들의 투철한 민족정신과 불굴의 실천의지가 없었던들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한 '카이로회담'에까지 이르는 임시정부의 독립을 위한 노력과 투쟁은 이와 같은 일련의 난관들을 뚫고 나가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과 독립신문·독립협회의 '겨레정신·민족정기' 발출, 
안중근의거·기미독립혁명, 주체적 '민주민중(시민)'의 사명의식·실천의지의 실현

 

유학사상의 성인지도(聖人之道), 곧 '선비정신'이 조선 말기에 외척들의 무도한 세도정치로 인해 결정적 손상을 입어 힘을 잃고 말았다. 그런 탓에 그 지적능력이 추동했던 519년 역사의 조선왕조는 외세의 침략에 속절없이 무너져 갔다. 이렇게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위난지경에 처하자 1894년 2월 15일,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였고, 위대한 선구자, 혁명의 리더(메시아 messiah, 열정적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이 목숨을 걸고 앞장서서 혁명대오를 이끌었다.

 

농민대중이 단결하여 일으킨 이 봉기, 역사적인 '2·15동학농민혁명’은 멸시당하고 핍박받던 백성들을 일깨워 무도하고 불의한 세태, 무원칙과 부조리에 탐닉하는 부패한 봉건적 기득권 세력과, 약육강식의 외세에 용감하게 맞서 싸웠던 민중의 항거였다. 농민항쟁·민족투쟁으로써 세계사적인 의의를 발출한 ‘민중혁명’이었기에 더욱더 뜻깊으며, 그 후에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항일 의병투쟁'의 발원이어서 마음 든든하고, 그 강고하고 당당한 민족혼이 자랑스럽다.

 

현재진행의 '11·12민주시민혁명'(촛불혁명) 역시 우리선열의 이러한 정신과 정기를 이어받아 3·1독립혁명,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에 이르는, 도도(滔滔)창창(蒼蒼)한 역사의 물줄기로부터 연원한 ‘주체적 민주시민’으로서 사명의식과 실천의지의 발로인 것이다. 이 변치 않는 겨레정신·민족정기는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그리고 일제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 처단했던 '안중근(安重根)의거'로 면면히 이어져 발현하였다.

 

1896년 4월 7일, 불세출의 지식인, 선각자 서재필(徐載弼)이 순한글의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총과 칼을 던져 버리고 붓과 펜을 집어 들어 여론을 선도하고 수렴하여 공론화하는 데 앞장섰다. "알 권리는 살 권리!" 그래서 온 겨레가 환호했으며, 신문을 이 사람 저 사람 돌려가며 읽었고 장터나 저잣거리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거나 오고 가는 곳에서 소리쳐 낭독하기도 하였다. "오가는 손님이며 장사하는 사람과 시골 백성들이 어깨를 비비고 둘러서서 재미를 붙여 함께 듣고 찬탄하더니만, 그 다음부터는 물건 사러 오는 사람만이 아니라 독립신문 낭독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장시로 몰려들었다" (1986년 6월 7일자 '독립신문')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 4일, 정부에 인수되어 폐간되기까지 거의 4년 동안 파란만장한 시대에 ‘근대 민족주의·민주주의·자주적 근대화’를 구현하는 언론창달의 소임을 다하였다. 그렇게 언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파급하여 다른 민간신문의 발간에 길잡이가 됨으로써 한글전용의 제국신문, 매일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이 연이어 창간되는 산파 역할을 하였다. 또한 3․1운동 직후 1919년 8월 21일, 중국의 상하이에서는 또 다른 ‘독립신문’이 창간되어 1926년 11월 30일까지 무려 28년 동안 민족언론으로 활약하였다.

 

상하이판 독립신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념, 목적과 활동상황을 널리 알리고 임시정부의 요인과 한국인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으며 독립정신의 고취, 일제만행에 대한 비판, 그리고 독립운동·항일투쟁을 적극적으로 추동하고 암암리에 지원하였다. 이처럼 독립신문을 위시한 민간신문들은 암울하기만 했던 구한말의 극심한 혼돈과 일제 식민통치의 폭압 속에서도 ‘자주국권·자유민권’을 주창하고 선도하는 민족언론으로서의 눈부신 활약을 끊임없이 전개해 나갔다(몹시 힘겹고 어려웠으나, 이를 이겨내며 언론창달에 진력할 수 있었던 것은 한글만이 갖는 의사소통의 폭발적인 위력이 뒷받침된 데 있었다).

 

독립신문의 '정론직필'을 통해 대한의 민중은 민주정신과 시민의식의 확립과 동시에, 이를 실천하는 정치적·사회적 행동양식을 터득해 나갔다. 그렇게 형성되고 정립된 '민중(시민)의식'과 사회기류 타고 독립신문이 창간된 그 해 1896년 7월, '독립협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독립신문이 원동력인 독립협회는 사상초유의 민중의 주체적 자유결사체로서 집회, 토론 등을 통하여 민의(여론)을 결집하고, 이의 실행을 요구하는 역할(언론·결사·집회 자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정부비판, 관리탄핵을 불사하는 '권력감시 운동'에 대한 금지령을 거부하고 항거하여 고종으로 하여금 "자기의 의견표현의 권리행사는 신하의 의무"임을 인정하게 한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이에 머물지 않고 중추원(정부자문기구)의 기능을 상원(의회)로 전환시키는 제안을 하였으나, 묵살 당하자 1898년 10월 1일,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12일 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회·시위를 강행하여 끝내는 의회설립(수락)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그 해 11월 5일, 중추원 의원선거일에 정부당국은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폐지, 공화제를 실시할 저의가 있다는 모함(대자보 부착)을 빌미로 17인의 협회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해산명령을 내린다. 이에 절대다수의 민중이 반발하여 최대규모의 만민공동회를 개최, 강력히 항거하였다. 그리하여 체포되었던 인사들이 석방되기는 했으나, 모함·모의 관련자 처벌, 독립협회 해산명령 철회를 요구하며 집회를 계속한다. 그런 가운데 '황국협회'의 지원 세력인 보부상들의 습격을 당하자, 이에 격분한 시위 군중이 이들 무리를 격퇴시키면서 만민공동회에 동참하는 민중이 크게 늘어났다.

 

사태가 악화 일로로 치닫자 11월 26일, 고종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만민공동회 대표를 직접 찾아가 모든 요구조건을 수락하고 '칙어'를 내려 과오를 반성하며 서로가 화해 소통할 것을 확약하였다. 그렇지만 만민공동회는 전 국민의 심적·물적으로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받으며 불철주야 연일 계속되었다. 그런데, 예전과는 달리 도시의 주민, 곧 '시민' 1, 2만 명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집회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렇게 대다수의 일반대중, 시민들의 성원 속에서 비바람과 취위를 무릅쓰고 밤샘 집회시위도 마다하지 않고 지속되었던 만민공동회는 정부의 폭력을 앞세운 강제진압을 이겨 내지 못하고 해산되고 말았다.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만만공동회를 통하여 도시민의 '시민의식'을 고취시켜 주체적 결사체의 역할을 다했던 독립협회는 세계열강의 국권침탈과 지배세력의 민권유린에 극력 대항하여 '자주국권·자유민권·자강혁신'의 민족정신의 구현에 앞장섰다. 그러한 사상·이념에 기초한 행동을 통하여 '민족주의·민주주의·사회근대화'의 실천에 매진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적 '사회정치단체'(NGO)로서 그 정신과 전통이 정립되고 확대, 확산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안중근의거, 3·1독립혁명을 거쳐 임시정부수립, 자주독립으로 이어지는 이 역사적 의의를 현세의 우리가 상기, 계승하고 실천해 나가야 마땅하다.

 

겨레정신 '독립·민주·평화' 구현, 국민주권 '민주공화제' 실현, '자주독립' 쟁취,
ㅡ 임시정부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대한민국정부'로 개칭은 후대의 책무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self-determination)가 천명된 1918년 8월, 상하이에서 젊은 독립지사들을 결속하여 '신한청년당'을 결성, 독립운동·투쟁에 돌입한 여운형(呂運亨)과 의기투합한 동지 김규식(金奎植, 수년간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정신' 고취), 위대한 민족지도자·선각자인 이들은 비폭력·평화적 '범민족 독립운동'을 구상하고 계획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이를 통하여 계획의 실행은 열혈 청년당원들이 도맡아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광폭적으로 전파, 독려하였다. 그래서 2·8독립선언을 시발로 대한의 독립, 겨레의 자주를 세계만방을 향해 선언하며 민중이 봉기한 역사적인 거족적 '3·1독립혁명'이 실현되었으며, 그 혁명정신의 계승, 실천을 천명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것이다.

 

3·1혁명이 시작된지 40일이 지난 1919년 4월 10일 밤 10시부터 11일 낮 10시까지 속계된 회의에서는 본회의 명칭을 '임시 의정원'으로 정한 후, 국호지정(대한민국), 정부조직(집정관제) 변경(총리제), 국무원 선임(국무총리 이승만 李承晩, 내무총장 안창호 安昌鎬,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 최재형 崔在亨, 교통총장 문창범 文昌範, 군무총장 이동휘 李東輝, 법무총장 이시영 李始榮 등), 임시헌장(헌법) 제정(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있음', 제9조 '생명형·신체형 및 공창제를 전폐함')을 의결, 공포하였다.

 

이렇게 국민주권·민주정치, 만민평등, 국민의무, 천부인권, 의회중심제(제2조, 10조) 등, 민주적 이념을 천명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독립혁명'의 결정체이고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그대로 근원적 실체이며 실천적 동력이 되었다. 민주국가의 상징인 국명과 민주주의의 정신인 헌법을 제정하여 민주정부 수립의 근간을 이루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 곧 주권재민의 민주공화정을 반만년 역사 이래 최초로 실현하였으며 '민주주의' 역사 원년의 획을 그었다. 이처럼 민주국가의 국체와 정체를 바로 세우고 굳게 다진 임시정부는 3·1혁명정신을 구현, 실천하는 데 분골쇄신, 온 힘을 다하여 분투하였다.

 

그런 임시정부가 무엇보다 선결해야 할 지상과제는 대한민국의 '자주독립'(自主獨立, sovereign independence)이었으며, 그래서 조국의 독립을 기필코 달성하여 민족의 주권을 확실히 회복하기 위한 '항일 독립투쟁'을 불굴의 의지로 끊임없이 전개해 나갔다. 특히, 신한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던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역할이 눈부시도록 지대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했으나 항일투쟁의 청지기를 자처하여 경무국장 직을 맡아 맹활약했으며 1926년, 임시정부가 와해지경에 봉착하자 ‘위기극복’의 인물로 인정되어 최고책임자인 국무령으로 선출되었고 후에는임정의 주석으로서 책임완수에 진력하였다.

 

임시정부는 1932년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의거, 1940년 광복군 창설, 1941년 대일선전포고, 1942년 중국정부·미국육군 군사동맹 체결, 1943년 카이로회담(선언) 외교담판, 1945년 국내 진공작전 등등, 세계 독립투쟁사에 있어 전무후무한 장장 27년의 쟁투를 제2차세계대전의 종전과 제국주의 일본의 패망, 그리하여 끝내는 독립을 쟁취했던 그 날까지 거침없고 치열하게 멈추지 않고 지속하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전승국들로부터 특별한 처우와 배려를 받으며 대망했던 '자주독립'의 과업목표(task goal)를 달성하였던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 11월 27일, 전후 처리 방안을 논의하는 카이로회담이 개최되었고, 미국, 영국, 중국 등 연합국(전승국)의 정상들이 참석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서두에 밝힌 바와 같이) 이 회담에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한국의 독립을 대놓고 반대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 같은 난관을 돌파하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동인과 저력은 국제사회(연합국)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총력을 다해 전개했던 '대일항전'의 혁혁한 공적이었다.

 

이로써의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장제스 중국 총통, 이른바 '삼대국'(三大國)의 수뇌들은 마침내 공동선언(카이로선언, Cairo Declaration)에서 "한국민족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in due course)에 따라 한국을 '자주독립'시킬 결의를 하였다"고 공표하였다. 이 역사적이고 감격적인 카이로 선언은 대한민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확약된 최초의 선언이었다(이 선언의 이행을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선언(Postdam Declaration)에서도 재확인하였다).

 

더더욱 의미심장하기는 '대한독립'이 연합국의 승전에 의존하여 거져 얻어진 것이 아니라, 자발적·주체적인 독립투쟁의 결과, 당연히 주어진 결실로써 더없이 값진 대가인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주축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으로부터 망국의 치욕과 침탈의 수모를 당했던 수많은 국가와 민족들 가운데 연합국으로부터 자주독립을 인정하여 보장 받은 건 한국이 유일하다. 그 만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다른 국가의 정부들 보다 그 사명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바르게 해야 할 것이다(이는 항간에 제기되는 '건국절' 제정과는 무관하다).

 

치욕적이고 불확실한 시대상황과 굴절된 역사 앞에서 연조도 기반도 없어 그저 막연하고 처연한 심정에서 '임시' 정부로 명명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와 실상을 현재의 시각으로 직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수행하는 일은 후세인 우리의 책무다. 1919년 9월 11일, 한성정부를 비롯한 수개의 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에 통합·단일화되었으며, 따라서 '대한민국정부'의 궁극적 정통성은 그 해 4월 11일에 수립된 임시정부에 있고 주권의 주장, 주재국가(중화민국)의 승인, 국가적 정부책임를 완수하여 국제법적 요건을 갖춘 ‘합법적 정부’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 같은 정부의 합법성 충족뿐 아니라, 국가목적을 극대화하며 국정목표를 성공적으로 완결함으로써 '자주독립'을 쟁취한 혁혁한 공적을 중시해야 한다. 그래서 감히 제언하거니와, 고정관념을 깨는 역사적 재평가를 통해 1세기 전에 수립되었던 임시정부의 명칭에서 '임시'라는 수식어를 삭제하여 1기(초대) '대한민국정부'로 개칭, 정명(正名)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모든 세력과 정파의 이해와 이념의 차이 마저 뛰어 넘는, 우리한겨레의 공동목표·공동선인 자주독립의 쟁취와 국민주권의 회복, 그 원대한 희망과 간절한 염원을 앞장서서 성취해 나갔던 위대한 정신과 빛나는 업적을 반드시 기려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처럼 과감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Copernican revolution, 의식혁명) ㅡ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의 결행으로 '부패망국', 그 부정부패의 뿌리인 사리사욕과 아집을 남김없이 뽑아 버려야한다. 하여 '민주주의 사상과 이념을 기초로 '국민주권'의 민주공화정을 표방하고 실천하였던 임시정부의 '헌법정신'과, (이에 함축된) '겨레정신·민족정기'가 면면히 이어져서 이룩된 독립·민주·평화의 '3·1혁명정신'을 계승,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견위수명(見危搜命), 살신성인(殺身成仁)했던 선열들의 정신과 정기를 되살려 온 민족이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한데 모아 진정한 민주국가, 명실상부한 민주공화국의 건설과 평화통일, 민족번영의 완결을 위해 일로 매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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