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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을 떠올리는 청와대의 인문정신 문화계 오찬
인문학 열풍까지 지배의 수단으로 만들겠다는 것인가?
서울의소리 2013.08.11 [13:48] 본문듣기

지난주 '저도의 추억'을 서둘러 끝내고 인문정신문화계 원로급 인사들이 GH와 청와대 오찬모임을 가졌다. 김우창(이화여대 석좌교수),유종호(연세대 석좌교수),권영민(단국대 석좌교수),이시형(한국자연의학종합연구원 원장),정진홍(광주과학기술원 다산특훈교수),소설가 박범신,이인화씨,등 꽤 여럿이 초청되었는가 본데... 모인사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인용하면서  '박비어천가' 를 불렀고 또 어떤인사는 박정희의 공업화(근대화)를 찬양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오니피언 란의 ‘이택광의 왜?’를 읽다가 기절초풍할 사실을 알게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인문정신문화계 인사들’을 초청해 공식 오찬 모임을 가졌다는데, 참석자 중의 한 명이 괴테의 《파우스트》를 인용하며 마치 여왕 찬미를 방불케 했다는 것이다. 유신시대의 귀환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인문정신문화계’란 단어도 싸이코 코미디를 보는 듯한데 여왕 찬미까지 공공연히 벌어졌다니 기절초풍하지 않고 베길 리가 있겠는가? 

문제의 참석자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문장인 ‘영원한 여성이 우리를 고양시킨다’라는 문구를 인용한 뒤 “대통령께서 영원한 여성의 이미지를 우리 역사 속에 각인시켜서 우리 역사가 한창 빛나기를 기원한다”는 찬미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박정희의 딸인 박 대통령의 청와대에서 불렀다고 얼른 달려간 자의 발언이니 그렇다 해도, 여왕 찬미에 괴테의 《파우스트》를 인용했다니, 이 정도면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 중 최고라 할만하다. 

▲ 권력에 능욕 당한 파우스트

딱딱한 독일어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더없이 아름다운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괴테의 《파우스트》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단테의 《신곡》 등과 함께 인류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위대한 고전이자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다. 

특히 《파우스트》는 괴테가 무려 60년간에 걸쳐 유럽 전역의 신화와 전설, 민간신앙, 민요 등을 수집해 집필한 대작으로 인류의 구원 문제를 다룬 교양소설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철학, 과학, 문학, 정치, 행정, 의학 등에 정통했던 괴테 자신을 모델로 한 파우스트 박사가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으로 유명한 위대한 고전 《파우스트》가 2013년도의 대한민국에서 능욕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다. 

▲ 유신시대 인문정신문화계의 부활?

 문제의 참석자가 박 대통령과 비교한 ‘영원한 여인’은 파우스트가 사랑한 그레트헨으로 막달레나 마리아처럼 영혼이 순결해 예수의 부활을 함께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여인을 의미한다. 당시의 문학계는 사랑 때문에 자신의 혈육을 본의 아니게 죽이는 그레트헨처럼 순결한 영혼의 여인(특히 매춘부가 많다)을 구원의 상징처럼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필자는 문제의 참석자가 《파우스트》를 읽었으리라 생각한다. 이해는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지만 파우스트와 인류의 ‘영원한 여인’을 박 대통령에 대입해 우리 역사를 빛내달라는 말에선 아연실색을 넘어 구역질이 올라올 지경이다. 국방부가 항일독립군이나 애국열사들을 죽인 것을 군인으로서의 자랑으로 여기는 백선엽을 위대한 전쟁 영웅이자 최고의 군인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과 함께 가히 유신시대의 본격적인 부활이라 할만하다. 

그 목적과 접근방식, 전개과정이 인문학 본연의 가치와 의미에서 상당히 일탈한, 일종의 정치사회적 ‘인문학 열풍’을 이용한 유신시대의 복원을 보는 것 같아 모골이 송연할 정도다. 이러다간 박정희 시대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작품으로 일본 군국주의의 <교육칙어>을 그대로 베낀 「국민교육헌장」을 다시 외우고, 오후 6시면 울려 퍼지는 애국가에 똥을 누다가도 가슴에 손을 올리고 부동자세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울 따름이다.         

▲ 인문학 열풍과 유신의 부활

푸코는 우리가 열광하고 있는 인문학과 인문학자들이 기독교와 정신분석학, 건축학 등과 함께 부르주아 권력에 기생해 세상을 《감시와 처벌》의 감옥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낱낱이 파헤쳤다. 필자는 문제의 참석자의 천박한 권력 찬양과 《파우스트》에 대한 왜곡에 대해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걱정하는 것은 유신독재시절 국민의 의식에 국가와 최고 권력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세뇌시키는데 동원된 ‘인문정신문화계 인사들’이 다시 부활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재임기간이 하루에 하루를 더할수록 각 분야에서 되살아나는 유신의 망령들을 보고 있자면,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경험이 일천한 상황에서 어떤 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택광 교수가 자신의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동원된 인문학 열풍은 계몽주의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은 90년대와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이 권위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운동권 세대를 향해 ‘우린 민주화하지 않아요’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바탕이 될 수 있으며,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 그렇게 후회했던 것(국민을 가르치려 했던 것)과 동일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인문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계몽주의는 자본주의의 주인공인 부르주아지의 교양이자, 그들의 과학이고 정신문화이며, 정치경제 권력의 기반이다. 이런 본질적 특성 때문에 계몽주의 인문학이 부르주아의 지배를 촉진시키고 합리화해주는 수단으로 변질되기 일쑤였다. 그 결과는 극도의 불평등과 민주주의의 퇴행이다. 

▲ 인문학 열풍까지 지배의 수단으로 만들겠다는 것인가?

 필자는 순수한 인문학 열풍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 매스미디어와 개인화된 정보시대의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 번째 입문과정이기 때문이다. 다만 계몽주의 인문학의 역사가 부르주아의 일방적 지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인간 이성에 대한 성찰인 르네상스와 관념적 형이상학의 산물이 인문학이다.

 헌데 그 인문학이 계몽주의로 귀결되면 개인의 이성과 연대적 삶을 고취하는 것에서 부르주아의 정치, 즉 지배적 권력에 봉사하는 학문으로 변질된다는 것이 지난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필자는 이런 부작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던 19세기의 계몽주의 인문학이 1차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발흥, 2차 세계대전의 기원임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진 사실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박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인문정신문화계 인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가진 것이 순수한 의미의 인문학 열풍을 정치적으로 왜곡시키려는 것은 아닌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순수한 인문학 열풍을 보다 효율적인 지배를 위해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할 때 민주주의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 모든 지배적 권위를 해체해 민주주의를 강화한 포스트모더니스틀과 구조주의자들의 노력도 물거품이 된다.      

유신시대의 망령이란 박정희 시대의 18년으로 충분하고도 넘친다. 두 번째 세기말을 지나서 벌써 1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9세기의 계몽주의와 20세기의 권위주의적 독재는 제발 역사의 창고 속에 그대로 두시라. 사람이 먼저인 세상에서 조금 더 자유롭고 평등하며 진실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민주주의적 가치와 전통이나 제대로 실현하시라.   

국정원에서 김기춘까지 도대체 어디까지 유신으로 회귀하겠다는 것인가?

글쓴이- 늙은도령의 세상보기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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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 13/08/11 [16:40]
다카키 마사오- 김재규
닭대가리- 남재준
단 방법은 Yankee들이 시키는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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