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은 타인이 나를 존중해주고 받들어주길 바라는 감정이지만 자존감은 자신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표현된다.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이고 자존감은 자신을 존중하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자존감은 자신과 세상을 성찰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지표로 삼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자존심이 극한에 이르면 자존심을 굽힐 수 있게 된다.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 타인과 세상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존심을 굽힐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힘이 강한 지, 자신이 가진 힘을 잘못 사용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는 사람이 진정 자존감이 있는 사람이다. 자존심과 자존감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과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놓고 본다면 윤석열은 자존감은 지극히 낮고 자존심은 지극히 강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윤석열을 향한 시민들의 분노는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민생파탄, 굴욕외교,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이념전쟁으로 인한 국민갈라치기 등, 그의 패악질이 갈수록 도를 넘어서는 상황에서 탄핵의 목소리는 높아져만 간다. 그러나 세상에는 어두움이나 밝음 두 가지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 이러한 윤석열을 통해서도 알게 된 것들과 그의 업적이라고 할 만한 것들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첫째, 그는 대한민국 서울대의 수준이 굉장히 낮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국민들에게 알려준 당사자다. 서울대는 오래전부터 국가인재의 양성소 같은 역할을 해왔다. 그 이면에서 발생한 부작용 만만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서울대가 장악한 대한민국 사회는 이미 학벌사회로 진입하여 서울대 또는 SKY 대학출신 여부가 성공의 바로미터가 된지 오래다. 그러나 윤석열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엘리트 학벌 출신자가 반드시 명석하고 지혜로운 사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다. 서울대는 ‘공부만’ 잘하는 인류만을 뽑아 인성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학생들을 배출하여 사회의 암적 존재로 상장하는 과정에서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서울대의 모체는 일제가 만든 경성제국대학으로 제국주의의 산물인데, 서울대는 이러한 영향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배출한 온상이 되기도 했다. 또한, 한국식 교육의 구태의연함, 학구적 질문이 전혀 없거나 질문을 하면 오히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경직성, 수치적 평가에 집중하는 강의방식, 철밥통에 의거한 수직적 권위주의와 교수에 대한 비판을 용인하지 않는 자세 등의 문제는 서울대가 가진 고질병중의 고질병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노벨상 한명 배출하지 못한 국내에서만 최고의 대학으로 전락하여, 가장 자본주의화 된 대학으로서의 입지만 구축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국내든 해외든 선한 영향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엘리트를 뽑아서 바보로 만드는 대학으로 추락하여 결국 윤석열 같은 인간을 배출하고 만 것이다. 이는 윤석열을 통해 보여준 서울대의 실상과 민낯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윤석열을 통해 우리는 검찰의 속성과 맨얼굴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오직 공부만으로 사법고시에 패스하거나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부류들인데, 그들이 하고 있는 짓거리는 오직 얄팍한 법지식을 적용하는 것 밖에는 없다. 그러다 보니 법지식으로 약자를 괴롭히고 자신들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게 된다. 법은 국가생활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며 우리가 속한 국가생활공동체가 바라고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 그 구성원들에게 기대하는 일정한 모습에 합치하는 행위를 하도록 통제하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질서 유지와 인권의 보호 그리고 정의실현 등을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검찰은 자신들의 수사권과 기소권이라는 막강한 권력으로 기소독점주의 기소편의주의라는 개념을 검사중심의 세상질서를 만들어 가는데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약자에 대한 인권보호보다는 법을 이용해 약자에 대한 조롱과 멸시가 일반화되다 시피 했던 것이고, 결국 정의실현이라는 법의 목적은 등한시 한 채 ‘검찰의 목적 실현’이 우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바로 윤석열과 그 휘하의 검사졸개들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셋째, 윤석열은 국민들을 학습하고 공부하게 만드는 희한한 장점의 소유자이다. 그는 최근 몇 달 동안 홍범도 장군을 내세워 전국민을 이념전쟁으로 끌어들였다. 갑작스럽게 사용하기 시작한 공산전체주의라는 용어가 문제되기도 했다. 사전에도 없는 ‘공산전체주의’라는 말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건 윤석열이 지난 광복절 경축사를 시작으로 이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다.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광복절 경축사)”,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들은 허위조작, 선전 선동으로 자유사회를 교란시키려는 심리전을 일삼고 있다(민주평통 연찬회)”,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이 반일 감정을 선동하고 있다(국립외교원 60주년 기념식)” 등 발언이 쏟아졌다. 윤석열의 이런 발언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고 이승만·박정희 독재를 옹호하는 뉴라이트 역사관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식민사관의 일부이다. 윤석열의 이러한 발언은 학교에서조차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공산주의를 공부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고, 네이버 검색이나 구글링을 통해 공산전체주의를 찾아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어디 그 뿐인가. 홍범도 장군 관련 영화 다시보기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으며, 홍범도 장군 관련 책들은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상황이다.
넷째, 윤석열을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 제도의 취약함을 알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완성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러한 민주주의 선거제도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민주주의가 일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겠구나’라는 위기의식이 피어난 셈이다. 문제는 개념으로서의 민주주의가 현실에서 실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국민이 주인이라고는 하나 국민은 한 명이 아니라 다수이기 때문에 실제로 모든 국민이 주인 역할을 하도록 만든 제도가 대의민주주의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민주 국가에서 사용하는 방책 중의 하나의 대의민주주의 방식인 다수결주의이다. 그런데 다수결주의는 심각한 잠재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바로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이다. 다수결주의 하에서는 다수가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의 기본권마저도 짓밟을 위험성이 항상 존재하며, 특히 다수와 소수가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을 경우 소수는 항상 소수로 남아 자신의 의견이 절대 반영되지 않는 억울함을 겪게 된다. 문제는 윤석열이 당선된 득표율은 48.56%로 2위와의 격차는 불과 0.73%였던 것이다. 즉 50%가 넘는 국민들이 다른 사람에게 투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1위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승자독식의 민주주의 다수결 방식에 의해 윤석열은 모든 것을 차지하고 만다. 문제는 이후 지속적인 지지율 하락으로 전국민의 압도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사건사고와 문제시된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를 민주화 이전인 1980년대로 돌이키고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법조인 같은 특정 직업군이나 오피니언 리더 그리고 정치인들도 대화의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과 반한다는 이유로 쉽게 흥분하는 대신 차분한 감정을 유지한 채, 이성적인 태도를 보이려고 노력한다. 이는 일반인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정치인의 경우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화를 내는 장면이나 흥분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앞뒤 상황설명 없이 그 부분만 교묘히 편집하여 도는 짤 영상으로 망신을 당하며 인기를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정치생명의 유지나 연장 또는 인기도 하락과 같은 정치적 운명을 포함하는 행위가 부정적으로 노출될 경우 정치인에게 결코 유리하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감정과 태도가 일치할 경우 겪게 되는 논란을 최대한 피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사이다 발언이라고 칭송하는 경우에도 흥분하는 감정을 자제한 상태로 감정노출을 억제하며 하는 발언이기 때문에 더 환영받는 것이다. 즉, 감정과 태도를 분리하여 최대한 건조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더욱 각광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세계의 논리에서 윤석열은 다분히 예외적인 인간이다. 그는 과거 국회에서 보여준 행태만으로 여러 가지 지탄을 받은바 있다.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치는가 하면 국회를 무시하는 자세로 삐딱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미 대선 전부터, 그리고 그 이전의 검사시절부터 그의 태도는 그의 감정 섞인 발언과 행동으로 연결되어 수많은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희한한 인물이다.
형편없는 언변에 학습되지 않은 이념, 그리고 경험 없는 정치력을 가진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존재하는 대한민국에 위기가 찾아왔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를 끌어내리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제 윤석열을 퇴진시키거나 탄핵하고 진짜 대한민국을 만드는 시간이 필요하다. 더 많은 국민들이 대오각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