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비난하는 보수세력.. "자신들의 뿌리가 친일파에 있다는 것을 자백하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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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술은 27년 동안 사상범, 즉 독립운동사건만 취급하는 고등계에서 근무하면서 오늘날의 총경급인 경시까지 승진했던 극소수의 조선인 경찰 중의 한 명이었다. 특히 내노라하는 고문 기술자로 유명했는데, 어떤 강골이라도 그에게 한번 걸리면 거의 초주검이 되었고, 실제로 3명의 독립운동가가 목숨을 잃었다.
현충일이었던 6일은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들어졌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반민특위를 친일 경찰들이 습격해서 해체된 지 70년이 된 날이기도 했다. 친일 관련 증거들은 그래서 없어졌고, 친일파 단 1명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JTBC가 이날 보도했다.
반민특위 출범 당시에 반드시 단죄해야 할 친일파 1순위로, 많은 사람들은 친일 경찰 노덕술을 꼽았다. 반민족행위자로서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비호로 풀려난 뒤 승승장구해 국회의원까지 출마했던 악질 친일파이다.
반민특위는 실제로 그를 붙잡았는데 노덕술의 체포는 되레 반민특위 습격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노덕술 체포 이후에 석방을 직접 지시했는데 이런 내용은 당시 국무회의 회의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고문으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은 반민특위 주요 체포 대상이었다. 그는 1949년 1월 25일 붙잡혔는데 이승만이 직접 그의 석방을 챙긴다. 체포 3일 뒤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노덕술은 치안기술자로 정부가 보증해서라도 풀려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또 2월에는 노덕술을 반민특위 사무실에 가뒀다는 보고를 받은 이승만이 "불법 조사관과 지휘자를 체포해 법에 따라 처리하라"고 지시한다. 또 다른 기록에는 대통령이 직접 반민법 해당자를 비밀조사하고 선처하라고 지시한 내용이 적혀있다.
이승만은 반민특위 시작부터 "민심을 흩어놓고, 손해만 생길 뿐"이라며 부정적이었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돕던 친일파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반민특위 습격 사건 직후인 8일 AP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내가 특위 경찰대 해산을 요구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친일파와 이승만의 '6월 총공세'에 반민특위 활동은 급속하게 힘을 잃었다. 허종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는 "응당한 처분을 받아야 되는 것이죠. 우리 사회는 오히려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해서 설치됐던 반민특위가 좌절되면서 면죄부를 주게 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는 나치 협력자를 처벌한 유럽 국가들과 대비된다. 프랑스는 사형 선고를 6000건 이상 내렸는데 이 중에서 700건 넘게 실제 집행했다. 강제노동과 징역형을 3만 5000건, 부역죄도 4만 6000건 선고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일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법적 처벌받은 사람은 단 1명도 없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70년 전에 반민특위가 있었던 곳이 현재 서울 을지로의 한 공사장이다. 이곳에는 당시 전국에서 보낸 친일 인사들에 대한 고발장과 또 각종 증거가 최소 수만 건이 모였다. 반민특위는 이 증거들을 토대로 친일파를 체포해 나갔다.
그러나 70년 전 1949년 6월 6일, 친일 경찰 수십 명이 이곳을 습격했다. 오전 8시 당시 중부경찰서장 윤기병 등 경찰 50여 명이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이틀 전,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가 친일행위로 반민특위에 체포된 것에 반발하면서다.
김옥주 제헌의원의 아들인 김진원 씨는 "(반민특위 요원이) 질질 끌려 청사 뒤뜰에 가 보니 이미 많은 요원들이 두들겨 맞고, 무릎이 꿇리어 앉혀져 있었다"며 "특위 사무실 내 총무과에는 친일 행적이 담긴 문서들이 쌓여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증언했다.
백재호 조사관은 목포에서 온 고발장 6000통이 경찰은 문서들을 모두 찢거나 불태웠다고 했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의 아들인 김정륙 씨는 "이게(문서) 없으면 반민특위는 사실상 기능을 잃고 마는 건데… 그러니까 애들(친일경찰)이 들어와서 이 흔적부터 없애버린 거예요."라고 지적했다.
친일의 증거가 사라지면서 체포된 친일파들이 줄줄이 무죄로 풀려났다. 광복 후 이승만 정부에서 경찰 간부의 80%는 일제에 부역한 친일 경찰로 채워졌다. 경찰 조직을 장악한 친일 경찰들은 자신들을 향할지도 모를 칼날을 피하기 위해 반민특위 흔들기에 안간힘을 썼다.
서울에 이어 강원과 충북 등 지역 조사부가 잇달아 공격받았고, 그 사이 반민특위 위원들은 모두 자리에서 물러났다. 친일 경찰들의 기습사건이 일어난 지 4달 만에 반민특위는 완전히 해체됐다.
문 대통령 독립운동가 김원봉 언급에 보수세력 맹비난
문재인 대통령이 이번 현충일 추념사에서 일제 강점기 시절 '좌우 합작'을 통해 창설된 광복군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라고 언급하자 자유한국당은 물론 조선·중앙·동아 등 보수신문도 7일 일제히 문 대통령을 거세게 비난하며 반발 했다. 광복군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 등이 참여한 것을 아래와 같은 딱 한 대목을 언급했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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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일보는 7일 신문 사설과 지면을 통해 문 대통령이 현충일 추도사에서 약산을 언급한 것에 대해 "6·25영령 앞에서, 김원봉 띄우기" '6·25 남침 뒤집기'라며 맹비난했다. 자한당 등 야당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까지 서훈하기 위한 분위기 조성이냐"며 즉각 반발했다.
덧붙여 "일제 강점기 당시 항일무장 투쟁을 주도했던 약산의 활약은 익히 알려져 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라며 "대한민국 군대의 정통성 역시 재론의 여지가 없다"면서 "대한민국 독립사에 이런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 월북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공적을 모조리 폄훼 당하고 비하 받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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